디씨코믹스 패러디 

제이슨 토드


IF 제이슨이 조커에게 죽임 당하지 않고 배트맨이 제때 구해주러 왔다면,

그 이후에 자경단 활동을 하면서 평범하게 자랐다면, 안티히어로가 되지 않은 세계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저 스스로가 출간해 낸 책을 홍보하려고 의미없는 글을 강단 위에 서서 읽고 있는 교수는 이 넓은 강의실에서 유일한 소음이었다. 광활한 공간에 비해 수강생들도 압도적으로 적었다. 거의 학생들 사이 두세자리씩은 띄어 앉아도 될 정도였다. 그럴 정도 인것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모두 가 그렇게 앉아있었다. 필수도 아닌 교양수업에 학생들은 강의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각자의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보내고 있었다. 저 늙은이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고개를 꾸벅거리며 잠든 이들이 있는가 반면, 무언가 , 수업과는 전혀 관계 없는, 열심히 적어 내려가는 이들도 있었다. 티가 나지 않게 몰래 휴대폰을 하는 이들도 있었고, 대놓고 노트북을 꺼내 제 할일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듯 소리 하나만큼은 새어 나가지 않았다. 마치 학교 도서관에 제일 일찍 출근 했을때와 같은 고요함이었다. 그 정적 속에서 한순간이었다 네가 내 옆에 다가와 앉은것은. 그 많고 많은 자리들 중에서 내 옆에 온 것은.


너를 모른다고 하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일것이다. 이 도시,  더 자세하게는 이 학교, 아니, 적어도 이 공간 안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학교뿐만이 아닌, 이 도시 그 자체의 설립자, 웨인가의 사랑받는 둘째아들. 매스컴은 주로 셋째 아들 티모시를 더 다루지만, 이 학교에서는 이 남자가 제일가는 수퍼스타다. 제이슨 웨인. 유명한 것 치고는 생각보다 평범하게 다니는것 같았다. 저 스스로도 이번 학기가 되기 전에는 지나가는 풍문으로 듣는게 다였지만, 하필이면 이 교양 수업이 겹치는 바람에. 


그의 큰 배경과 여러가지 생각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있을때, 너는 말을 걸어왔다. 적을 걸 두고 왔다고, 필기구 하나만 빌려다라며 손을 내밀며 부탁하는 네 모습을 앞에 두고, 크고 투박한 네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굳은 살 투성이었다. 곱게만 자라왔을것 같은 도련님의 손바닥이 굳은 살 투성이라니, 뭔가 묘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수업말고는 딱히 얼굴을 비추지않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 학교를 입학한 그 날부터 계속 네 얘기만 들려왔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네 얘기만 들려온게 아니라, 네 얘기만 물어왔다. 그에게는 지금이 처음 보는것이겠지만, 나는 이미 그를 입학식 첫날 마주했다. 고담의 스케일은 예전부터 익히 알아왔지만, 직접 경험해보게 된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입학식 도중 난입하여 난동부린 펭귄과, 하필이면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가 봉변을 당할뻔 한 저를, 모두가 패닉한채로 도망칠때 저를 구해준건 그였다. 그때부터 자꾸만 시선이 그의 발자락 끝에 머물렀다. 그의 이름만이 유난히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교양 수업 첫날, 출석을 부르는 교수님의 부름에 대답하는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그 이름을 듣고, 그 날이었다. 그날, 그 한순간이었다. Here. 그 목소리에 나는 사로잡혔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것 무엇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너만이, 너만이 내 시야를 가득채웠다. 그 낮은 목소리로 내는 너의 웃음소리가 궁금해졌다. 네가 웃으면 어떤 느낌일까, 사소한것 하나하나가 나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아무것도 없어?"


훅 들어온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어, 여기. 별모양이 이리저리 찍혀있는 샤프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뜨거웠다. 교수에게 들키지않게 살짝 미소만 보인뒤 그는 다시 무언가 쓰는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더운것같았다. 강의실 에어컨이 고장났나 싶었다. 옆을 쳐다보니 가벼운 겉옷을 걸치고 있는 제이슨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강의 실 안에 있던 그 누구도 더운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나만 더운건가? 손바닥을 뺨에 가져다 대자, 그제서야 깨달았다. 뜨거운건 그의 손가락이 아니라 제 것이었다. 심장이 유난히 빨리 뛰는 것 같았다. 뜨겁다 못해 온몸이 폭발할것같았다. 아마 누군가 저를 본다면 빨간 홍당무라고 착각할것이다, 분명. 이러다간 얼마 안가 모든게 다 들통날것 같았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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